음원 어플보다는 유튜브를 즐겨보는 나이기에 서너달 전쯤이었나, 지니를 정지시켰다. 불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찬양을 듣는 일까지 적어졌다. 오히려 파일로 묶어 넣어야했던 귀찮은 MP3시절에 더욱 열성적으로 찬양을 사모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 삶이 결코 풍족할 수 없었다는 것과 들어야 하는 음악이 따로 있다는 참 적절한 핑계를 대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요즘은 24시간 밖에 안되는 하루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디자이너 선생님과 막바지 작업에 들어가고, 론칭 준비에 빈 시간을 고르고 찾아내 연습하는 뿌듯한 하루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감정이었다. 뿌듯함과는 다른..., 뭐랄까 ‘오묘한 부족함’이 내 마음에 항상 있었다. 나의 계획과 일정만 본다면 분명 부족한 것이 하나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은 허상이 될 수도 있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결코 풍족하다, 풍부하다, 풍성하다는 말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답을 어제 전주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업무를 끝내고 교회로 돌아와 찬양을 찾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아, 이게 지금까지 내가 놓치고 있던 답이구나.’ 라고 깨달았다. 나의 빈공간 하나까지도 모두 은혜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 말이다. 어떤 것이라도 약간의 빈틈으로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빈틈을 채우지 않는 것은 엄청난 무너짐을 가져오는 문제가 된다. 조금씩 멀어지고, 벌어지고, 무너지는 시발점이 빈틈의 방치라는 것. 또한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체 하는 것은 문제 이상의 교만함에서 오는 더 큰 문제이다.
문득, 내 삶에 각박함을 잠재우고, 너그러움으로 채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분명 찬양이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오늘따라 잠언 16장 9절 말씀이 마음에 맴돈다. 가장 부족할 때, 가장 큰 부유함으로 다가온 말씀. 그 말씀이 나의 마음을 지긋이 누루는 듯하다. 인도하시는 분은 그 분이란 것을 왜 잊어버리는지. 나의 계획과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는 알면서 놓치는지. 내가 따라가야 할 발자취는 한 분이이라는 것들을 말이다. 전주를 올라오면서 지니를 재결제하고 어제, 오늘 계속 계속 찬양을 들었다. 따스함이 내 마음을 감싼다. 그래서 오늘은 제일 은혜받은 찬양을 하나 나눠보려고 한다. #히즈윌의 광야. 이하 더이상의 설명보다는 찬양을 들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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