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으로 그을린 사문의 발걸음을 따라, '잠식'의 무게를 짊어져야만 할 것 같은 시작이었다. '사색'에 잠겨야만 할 것 같은, '침잠'이 무엇인지 묵상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시작이었다. 아마 이러한 고요하고도 누르스름한 시작이, 1부 마지막, <깨달음> 챕터의 효과를 극대화된 시킨 것 같다.
'솟아오르는' 자아를 누르려고만 했던 싯다르타의 '첫번째' 깨달음 - 자아의 각성.
그는 '바라문'의 총명하고, 통찰력있는 아들로서의 (보장된) 길을 버리고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첫번째 여정을 떠난다. 그 길은 '사문'의 길로서, 고행을 견디고 욕심과 욕정으로부터 멀어져, 인간이 쥐고 있는 모든 감정과 생각, 즉 '자아'를 '비워내는' 수련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워내더라도 금세 '솟아올라오는' 자아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싯다르타는 '고타마' (책 안에서 부처라고 일컫어지는 존재)를 만나고, 그의 신비한 힘과 영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얻고자 하는 '무언가'를 사문의 길을 통해서나, '고타마'(타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을 한다. 그리고 그는 사문의 길을 그만두고 '무언가'를 깨닫기 위한 두번째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만물의 색채를 경탄하며, '자아' 그 자체를 받아드려야하는 깨우침을 얻는다.
2부에 들어서며 싯다르타는 '자아의 존재' 원천을 잃지 않는 것은, '삶의 기쁨'에 대한 열망이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사랑과 정결을, 셈 빠른 상인에게 장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가 알고있던 (훈련해오던) '사문'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는 여전히 특별하고 '유별난' 존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깨우침을 얻으면서 '특별한' 삶을 영위해나간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속'에 물들어가게 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영성'도 '특별'함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결국, 그는 다시 '사문'의 길, 세번째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전에 자신이 행했던 '사문'과는 사뭇 다른 길이었다. 그의 두번째 여정에 도움을 줬던 뱃사공, '바주데바'를 다시 만나면서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며 '뱃사공'으로서의 길을 따라나선 것이다. 그가 '바주데바'로부터 배우고자 했던 것은, 바로 '강으로부터 배우는' 자세였다. 그는 꽤 오랜시간 바주데바와 함께하며 진정한 '사랑' (아들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아픔' (아들을 놓아줌으로서 느끼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지혜' (아들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를 찾아내게 된다. 결국 그가 간절히 배우고자 염원했던 '무언가', 바로 '단일성'을 깨우치게 된다.
책의 후반부에 도달하며, 싯다르타는 그를 가장 사랑하고 사모했던 오래된 벗, '고빈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는, 싯다르타의 눈과 몸짓 하나에서 신성과 신비를 느끼고, 싯다르타가 평생을 일궈 얻어낸 '교리'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싯다르타의 답변은, '고빈다' 자신이 살아왔던 '올바른' 삶을 부정하고, 이단아처럼 유별났던 '싯다르타'의 삶을 인정해야하는 엄청난 대목이 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오가는 마지막 챕터는 개인적으로 가장 격렬했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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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맛은 "1 + 1= 2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 성문화된 개념이 아닌, 말하고 싶은 대상에 어떻게든 녹일 수 있는 개념적 학문이라는 것 아닐까 싶다. '바주데바'의 말을 빌려와 말해보자면, 철학은 '강'과 같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삶에서 '사문'의 길을 택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문'의 길에서도, 그가 원하는 '단일성'을 배울 수 없었다. 결국, '올바른' (그의 친구 '고빈다'가 유지했던 삶)을 과감하게 버리고, '세속'의 삶으로 들어간다. 그는 '세속'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여겼고,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자아'의 소리를 따라 다시 '사문' (뱃사공) 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결국 '모든 것'에서 배울 것이 있고,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경험해봐야 한다" 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마지막 '고빈다'의 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고빈다'는 부처를 따라 일생을 '배우는자'로 남아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서는 위대하고 고상한 사문으로 남은 사람은 고빈다이지만, 이생의 평화/ 열반/ 깨우침/ 자아를 얻은 것은 싯다르타이다. (내가 느낀바로는 고빈다는 열반에 이르지 못했던 존재였다. 어쨌건 싯다르타에게 "당신의 교리가 무엇인가?"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열반'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고생(다른 말론 '방탕'의 늪)을 해본 싯다르타가 더 많은 깨우침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앞서 나의 말을 뒤집어보자면, "결국 모든 것에서 배우게 되었으니, 과거의 실수든 잘못이든 결국 배움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다."라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싯다르타>를 통해 느낀 굵직한 두 가지의 감동은, (1) 지식이 아닌 경험으로부터,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되어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아'라는 것. (2) 그 어느 곳도 정답도, 오답도 아니라는 것. 모든 것이 공존했었을 때 비로소 안정과 완벽의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양면의 공존", 헤세의 말을 빌려오자면 "단일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데미안>에서도 헤세는 어둠과 빛, 악과 선, 세상과 종교, 사랑과 미움, 시간과 죽음... 두 가지의 대비되는 개념을 하나로 통합시켜 궁극의 '단일성' 언급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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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클래식'을 건든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고전이 수용하고 있는 많은 의미들은, 결코 '하나'의 개념이나 의견으로 정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1+1 = 2 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바로 고전이 용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긴 역사동안 쌓여온 해석도 참조도 무궁무진하니... (이러한 대작 앞에서 일개 '독후감'을 내민다는 것은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움) 게다가, 헤세(싯다르타)가,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 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야." 라고 언급했듯이, 많은 말과 설명이 감동을 해치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곳곳에 숨겨져있는 지혜와 통찰을 이런 감상평 한 장에, 의견 한 문장에 축약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광대한 개념에 한 발치 다가갔다는 기쁨으로 이 글을 남긴다. 세상을 알아 간다는거, 삶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 인생을 들여다 본다는건 진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이자 희열의 원천이니 말이다. 이번 한국에 다녀왔을 때 구입해온 유일한 책인데, 정말 좋은 책을 잘 집어온 것 같다! 유리알 유희도 사올걸... 이 북 말고 종이책으로 읽고 싶다. D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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